2013년 이집트 쿠데타는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의 퇴진을 목표로, 2013년 7월 3일 이집트 군부가 주도한 사건이다. 무르시 정부의 실정과 사회 불안, 타마로드 운동을 비롯한 반정부 시위 확산, 군부의 최후통첩 등이 배경이 되었으며, 군부는 무르시를 축출하고 헌법 효력 정지 및 아들리 만수르를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 쿠데타 이후 이집트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사회 분열과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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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 군 최고 사령관) 히샴 칸딜 (이집트 총리) 사드 엘 카타트니 (FJP 의장) 무함마드 바디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카이랏 엘 샤테르 (무슬림 형제단 부지도자)
주요 인물 2
압델 파타 엘시시 (군 최고 사령관, 국방부 장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 세드키 소비 (군 참모총장) 모하메드 이브라힘 (내무부 장관) 아흐메드 엘 타예브 (알 아즈하르 대학교 그랜드 이맘) 유네스 마키온 (알누르당 의장)
사상자
사망자
1,150명 이상
부상자
4,000명 이상
2. 배경
2011년 2월, 18일간의 대규모 시위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29년간의 재임 기간을 끝내고 사임했다.[518][527] 2011년 7월, 이집트 과도정부는 선거법을 승인했고, 이후 2011년 12월부터 2012년 1월까지 의회 대표, 2012년 1월부터 3월까지 자문위원회 위원들을 선거로 선출했다. 자유와 정의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2012년 6월, 무함마드 무르시는 51.73%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이집트의 첫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518][527]
그러나 무르시가 당선되기 전, 최고헌법재판소는 선거법이 위헌이라고 판정하고 당선된 의원들의 해산을 명했다. 무르시는 자문위원회에 35개 정당 인원을 추가로 지명하고, 총선과 자문위원회 선거에서 당선된 인원들을 초대해 최고헌법재판소의 판정에 대해 의논했다. 의회는 최고헌법재판소가 선출된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최고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한 심사를 파기법원에 맡겼다. 선출된 의회는 어떤 법도 통과시킬 수 없었지만, 자문위원회는 여전히 제안된 대통령 칙령에 자문했다. 또한 의회는 이집트 헌법 개정안을 만들기 위해 최고헌법재판소가 해산시킨 2012년 3월에 설립된 헌법 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 위원회를 만들었다. 제시된 개정안은 2012년 12월에 국민투표를 통해 받아들여졌다. 새 선거는 최고헌법재판소가 허가한 개정안에 의거해 2013년 4월에 예정되었지만 10월로 연기되었다.[528][529]
2012년 11월, 무르시의 헌법 개정 선언에 반대하는 집회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은 모하메드 엘바라다이, 아므르 무사, 함딘 사바히 등 무르시 반대파 정치인들이 무르시를 제거하기 위해 군 지도자들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고 보도했다.[530]
2013년 4월 28일, 타마로드 운동이 시작되어 6월 30일까지 무르시를 축출하겠다는 목표로 서명을 모으기 시작했다. 타마로드는 카이로의 대통령궁 앞에서 평화적 집회를 열었고,[531] 이 운동은 몇몇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532][533]
2013년 5월 퓨 리서치 센터 여론 조사에서는 이집트인 54%가 무르시를 지지, 43%가 반대했다. 30%만이 국가 정책 방향에 긍정적이었지만, 73%는 이집트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반 무르시 집회 이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2012년 11월 57%였던 무르시 정부 지지율이 2013년 6월 24%로 급감했다.[534] 이집트인 প্রায় 3분의 1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다.[535]
2013년 6월 15일, 무르시는 회담에서 이집트군의 시리아 개입을 촉구했다.[536] 국제위기그룹 분석가 야세르-엘-시미는 이를 "이집트 국가 안보의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었다"라고 평가했다. 다음날 이집트군은 무르시 발언에 즉각 반발하며 군의 의무는 이집트 국경 수호라고 밝혔다. 이집트 헌법상 대통령은 명목상 군 최고통수권자였지만, 이집트군은 민간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537]
무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다가오자, 친 무르시파인 정당성 지지 국가연합과 무르시 지지자들은 전국적 집회를 계획했고, 가장 큰 집회는 6월 30일로 예정되었다.[538]
2. 1. 2011년 이집트 혁명과 무르시 정부 수립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518][527] 이후 군부의 잠정 통치를 거쳐 2012년 7월,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자유 선거를 통해 이집트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122][27][28] 그러나 무르시 정부는 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행하고 반대 세력을 배제하면서 비판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에서는 2009년에 아브델 모네임 아부 알 루프트(عبدالمنعم أبوالفتوحar) 등 개혁파 인사들이 축출되고, 하이라트 샤테르(هيات الشاطرar) 등 보수 세력이 부상했다. 장기 독재 정권이 이어지고 의회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이집트에서, 분열된 소수의 자유주의 정당들(다만, 인민의회 선거에서 세속·자유주의 세력은 이집트 블록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다.)이 의회를 보이콧하는 가운데, 무르시 대통령이 선거 전에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한 페어몬트 합의를 어기고[250] 점차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이슬람주의 세력만을 중용[251]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 말기인 2013년 5월에 실시된 개각 단계에서도 35명의 각료 중 자유와 정의당(حزب الحرية والعدالةar) 및 형제단 계열은 10명에 불과했고,[252] 쿠데타 이후 베블라위 내각에서도 내무장관이나 관광장관 등 7명의 각료가 유임했으므로, 이슬람주의자만을 등용한 것은 아니었다.
2012년 11월, 무르시의 헌법 선언에 대한 시위가 발생한 후,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모하메드 엘바라다이, 암르 무사, 함딘 사바히를 포함한 야당 정치인들은 무르시 대통령을 제거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군 지도자들과 비밀 회의를 시작했다.[31]
2013년 4월 28일, 타마로드는 6월 30일까지 무르시를 제거하기 위한 서명을 수집하는 풀뿌리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특히 카이로 대통령궁 앞에서 이집트 전역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촉구했다.[32] 이 운동은 국민구원전선, 4월 6일 청년운동 및 강한 이집트당의 지지를 받았다.[33][34]
2013년 5월 퓨 리서치 센터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54%가 무르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43%는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약 30%가 국가의 방향에 만족했으며, 73%가 군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35%만이 지역 정책 당국에 대해 만족했다.[35] 시위가 일어나기 전, 갤럽 여론조사는 2012년 11월 57%였던 국가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2013년 6월 24%로 떨어졌음을 보여주었다.[36] 이집트인 약 3분의 1은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고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37]
6월 15일 회의에서 무르시는 시리아에 대한 외국 개입을 촉구했다.[38] 국제위기그룹의 분석가인 야세르 엘시미에 따르면, 이 발언은 "국가 안보의 금기선"을 넘어섰다. 군대는 다음 날 이 발언에 대해 이집트 국경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역할이라고 반박했다. 이집트 헌법은 명목상으로 대통령을 군 최고사령관으로 선포하지만, 이집트 군대는 민간 통제로부터 독립적이다.[39]
2. 2. 무르시 정부의 실정과 사회 불안
18일간의 대규모 시위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한 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모하메드 무르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집트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122][27][28] 그러나 무르시 정부는 경제난, 연료 부족, 치안 악화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42]
2012년 11월, 무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헌법재판소의 사법 심사를 무력화하는 헌법 선언을 발표하여 독재 회귀 논란을 일으켰다.[253] 새 헌법 초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강행되었지만, 자유주의 진영, 콥트교도, 야당 연합 등은 헌법 초안 작성 재검토 및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며 투표를 거부했다.[254][255]
무르시 정부는 무바라크 정권 시대에 임명된 검찰총장 해임을 시도하고, 반정부 성향 판사들을 퇴임시키기 위한 정년 단축을 시도하여 사법부와 갈등을 빚었다.
2013년 4월 28일, 타마로드는 6월 30일까지 무르시를 제거하기 위한 서명을 수집하는 풀뿌리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특히 카이로 대통령궁 앞에서 이집트 전역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촉구했다.[32] 이 운동은 국민구원전선, 4월 6일 청년운동 및 강한 이집트당의 지지를 받았다.[33][34]
2013년 5월 PEW 리서치 센터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54%가 무르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43%는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약 30%가 국가의 방향에 만족했으며, 73%가 군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35%만이 지역 정책 당국에 대해 만족했다.[35] 시위가 일어나기 전, 갤럽 여론조사는 2012년 11월 57%였던 국가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2013년 6월 24%로 떨어졌음을 보여주었다.[36] 이집트인 약 3분의 1은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고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37]
무르시 대통령의 축출은 시위 이후 발생한 쿠데타의 결과였으며, 이 시위는 무르시의 1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가 겪은 경제 문제, 에너지 부족, 치안 불안, 외교적 위기 등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되었다.[42] 무르시 축출로 이어진 시위의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
국가 구원 전선(National Salvation Front) 및 기타 야당 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2012년 이집트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한다.[43] 헌법 기초 의회(Constituent Assembly)의 여러 구성원들, 특히 교회 대표들은 개정 내용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헌법 기초 의회에서 탈퇴했다.[44][45][46]
전례 없는 경제 위기, 전력 및 연료 부족, 외화 부족 등이 발생했다.[47][48]
시나이 반도에서 16명의 국경 경비대원 살해 사건, 납치 사건,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 폭파 사건 등 치안 악화가 심각했다.[49]
이집트 군부의 경제적 이익이 작용했다.[50] 이집트 경제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5%에서 40%까지 추산되며, 광업, 부동산, 농업, 가전제품 생산 등 다양한 산업을 포함한다. 군부는 오랫동안 경제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민영화와 같은 현대 경제 정책에 반대해 왔다.[51][52]
외세 개입: 2015년 압델 파타 알시시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밀 녹음 파일이 유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무르시 대통령 재임 당시 UAE가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이기 위해 이집트 국방부에 자금을 제공하고 타마로드 시위 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녹음 파일에는 그 외에도 매우 논란이 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55][53]
무슬림형제단에서는 2009년에 아브델 모네임 아부 알 루프트(عبدالمنعم أبوالفتوح) 등 개혁파 인사들이 축출되고, 하이라트 샤테르(هيات الشاطر) 등 보수 세력이 부상했다. 장기 독재 정권이 이어지고 의회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이집트에서, 분열된 소수의 자유주의 정당들(다만, 인민의회 선거에서 세속·자유주의 세력은 이집트 블록을 결성하여 선거에 참여했다.)이 의회를 보이콧하는 가운데, 무르시 대통령이 선거 전에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한 페어몬트 합의를 어기고[250] 점차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이슬람주의 세력만을 중용[251]한 것이 이 쿠데타의 배경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권 말기인 2013년 5월에 실시된 개각 단계에 이르러서도 35명의 각료 중 자유와 정의당 및 형제단 계열은 10명에 불과했고,[252] 쿠데타 이후 베블라위 내각에서도 내무장관이나 관광장관 등 7명의 각료가 유임했으므로, 이슬람주의자만을 등용한 것은 아니었다.
무르시 정권 하의 외화 보유액은 정권 출범 1년 전인 2011년 6월에는 265.7억달러였으나[262], 정권 출범 시점인 2012년 6월에는 이미 155.3억달러로 감소했다.[263] 무르시 정권 출범 직후 처음으로 150억달러를 밑돌며 월 수입의 3배라는 안전 기준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 된 후로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는 카타르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위험 수준을 유지했고, 2013년에 더욱 악화되었으나 쿠데타 발발 두 달 전인 2013년 5월에는 외국 지원 덕분에 겨우 160억달러 수준을 회복하는 상황이었다.[264] 또한, 2000억달러의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대통령 취임 후 9개월 동안 유치한 금액은 겨우 14억달러로 0.7%에 그쳤고,[265] 전년 동기 대비 개선되었으나[266] 2000억달러라는 공약과의 차이가 매우 컸다.[267] 단, 무르시 정권 측은 이 목표 달성에 필요한 기간을 명확히 하지 않았고, 2000억달러는 1년 목표액이 아니었다.[267]
경제 성장률은 뭄바라크 정권 붕괴 직후 -4.3%까지 떨어진 후에도 2012년 1분기를 제외하고는 큰 개선을 보이지 않았고, 무르시 정권 출범 후에도 부진했다.[268] 경제 상황 개선의 지연은 선거 공약에서 밝은 전망을 제시했던 것과는 반대로 많은 국민을 실망시켰다. 더욱이, 정권 출범 이전부터 존재했던 연료 부족과 긴 줄이 늘어선 주유소 상황[269]은 보조금 삭감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처럼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재정 재건 및 렌티어 국가 탈피에도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집트 국채가 하락했고, 재정 재건을 조건으로 하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외화 부족의 영향으로 이집트 파운드가 하락했다. 정권 출범 후인 2012년 후반에는 이전보다 물가 상승률이 억제되었으나, 정권 출범 6개월이 조금 지난 2013년 2월부터는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율이 상승했다.[270]
한편, 관광 수입은 무르시 정권 출범 후 9개월 동안 전년 동기 대비 약 14% 증가했고,[271] 수출 또한 2013년 상반기 전년 동기 대비 17% 증가하는 등 개선되었으며,[272] 무역 적자 축소 등으로 인해 정권 출범 후 9개월 동안의 국제 수지 적자는 전년 동기 대비 80% 이상 축소되었다.[273] 또한, 재정 적자 대 GDP 비율은 2012/13 회계연도 10%대에서 2013/14에는 9.5%로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었다.[274]
2. 3. 타마로드 운동과 반정부 시위 확산
2013년 4월, 도시 지역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타마로드라는 반정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타마로드는 무르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32] 이 운동은 국민구원전선, 4월 6일 청년운동, 강한 이집트당 등 여러 당의 지지를 받았다.[33][34]
6월 28일 카이로에서 열린 반 무르시 시위대 행진
무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되는 2013년 6월 30일,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무슬림 형제단의 권력 독점, 경제난, 사회 불안 등을 비판하며 무르시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했다. 이 시위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로 인해 발생했으며, 다섯 명의 반 무르시 시위자들이 사망하면서 폭력적으로 변했다.[65]
6월 28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다칼리아, 가르비야, 아스완 등 이집트 전역에서 무르시 반대 시위가 타마로드가 계획한 6월 30일 대규모 시위를 위한 예열로 시작되었다. 무르시 지지자들과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은 나스르 시티의 라비아 알 아다위야 모스크에서 맞불 시위를 시작했다.[60]
6월 29일, 타마로드는 무르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청원에 2,2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62][63]
6월 30일, 검증되지 않은 군 소식통에 따르면 1400만 명의 시위대가 이집트 전역에서 무르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적인 관찰자들은 실제 무르시 반대 시위대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우려를 제기했으며, 한 인파 통계 전문가 연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66][67]
3. 군부의 개입과 무르시 축출
2013년 6월 30일, 무함마드 모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일에 이집트 전역에서 모르시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모르시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평화롭게 시작된 시위는 반(反) 모르시 시위대 5명이 사망하면서 폭력적으로 변했다. 모르시 지지자들도 집회를 열었지만, 시위대의 다수는 모르시 반대 세력이었다.[65]
6월 30일 군 소식통은 14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지만, 독립적인 관찰자들은 실제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한 인파 통계 전문가는 전국적으로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추정했다.[66][67]
7월 1일, 10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타흐리르 광장과 대통령궁 앞에 다시 모였고,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수에즈 등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71] 일부 경찰관들은 제복을 입고 무르시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경찰과 국민은 하나다"라고 외쳤다.[72] 무카탐에 있는 무슬림 형제단 본부 주변 충돌에서 8명이 사망했고, 시위대는 본부 건물을 약탈하고 방화했다.[73]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무르시에게 전화하여 긴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기 대선을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지만, 무르시는 "이집트 국민이 결정한다"고 답하며 전화를 끊었다.[50]
7월 2일, 군부가 설정한 시한이 다가오면서 카이로에는 무르시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모였다. 군부는 어느 쪽도 제거하지 않고 개입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다음 날 쿠데타를 일으켰다.[76] 카이로 대학교 인근 무르시 지지 집회 주변 충돌로 18명이 사망했고,[77] 모하메드 카멜 아므르 외무장관도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하며 사임했다.[78]
7월 3일, 심야 텔레비전 연설에서 무르시는 "선출된 직책의 정당성을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라고 선언하며 사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85] 그는 호스니 무바라크 지지자들이 정부 전복을 위해 시위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87] 무르시의 발언 후, 이집트군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마지막 시간들"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는데, "모든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 무지한 자들에 맞서 이집트를 위해 목숨과 피를 희생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88][89]
2013년 4월의 압델 파타 알시시
군부의 최후통첩 시한이 다가오자 폭력 사태가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90] 군 탱크들이 무르시 지지 집회를 포위했다는 보고도 있었다.[91] 군부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등 각계 지도자들과 회의를 가졌고,[92] 무르시는 합의 정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자유정의당은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92]
오후 5시 30분경, 공화당 경비대장 모하메드 아메드 자키가 무르시를 체포했다.[50][93]
한편, 무르시 정권은 에티오피아의 댐 건설에 반발하며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2013년 6월에는 TV 생방송 중 야당 당수가 에티오피아 반정부 세력 지원을 주장하는 발언이 방송되기도 했다.[275] 이는 국내 문제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에티오피아의 댐 건설은 수단도 반발하는 외교 문제이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251][276][277]
3. 1. 군부의 최후통첩
2013년 6월 23일, 압델 파타 알시시 국방장관 겸 이집트 국군 총사령관은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경우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1주일의 유예 기간을 부여했다.[542]
7월 1일, 이집트군은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에게 48시간 이내에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고 포괄적인 로드맵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542] 군부는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74] 같은 날, 히샴 자주 관광부 장관, 아테프 헬미 통신정보기술부 장관, 하템 바가토 법률 및 의회 담당 장관, 칼레드 압델 알 환경부 장관 등 4명의 장관이 사퇴했다.[75]
3. 2. 무르시 축출과 과도 정부 수립
2013년 6월 30일, 무함마드 모르시 이집트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일에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시위대는 모르시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했다. 7월 1일, 이집트 군은 7월 3일까지 이집트 정당에 이집트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48시간의 최후통첩을 보냈다.[542]
현지 시간으로 7월 3일 밤, 이집트 군부는 모르시의 정당성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이집트 헌법의 효력이 중지되고 아들리 만수르가 차기 선거 때까지 임시 대통령의 역할을 할 것임을 선언했다.
2013년 여름에 유출된 녹음 파일에는 전 장군 압델 파타 엘시시를 포함한 이집트 군부 인사들이 모르시 축출에 앞선 대규모 시위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54][55][56] 유출된 녹음 파일 중 하나에서는 장군들이 모르시에 대한 법적 사건 조작을 논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다른 녹음 파일에서는 모르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한 타마로드의 은행 계좌에서 군이 사용할 거액의 자금 인출을 승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55][56]
4. 쿠데타 이후
2013년 7월 3일, 군부의 최후통첩 시한이 다가오면서 이집트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무르시 찬반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고, 군 탱크들이 무르시 지지 집회를 포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91] 군부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등 각계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졌고, 무르시는 합의 정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군부는 이를 거부했다.[92]
같은 날 오후, 모하메드 아메드 자키 공화국 경비대장이 무르시를 체포했다.[50][93] 압델 파타 알시시 장군은 TV 연설을 통해 무르시 대통령 해임과 새로운 대통령 및 슈라위원회(자문위원회) 선거 실시를 발표했다. 아들리 만수르 대법원장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고, 기술관료 정부 구성을 위임받았다.[94] 무르시는 가택 연금되었고,[94][95] 군 병력이 카이로 전역에 배치되었다.[98]
알시시는 "국민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 무르시의 연설을 비판하며, 군부가 "국가 세력 및 청년들의 상징들과 협의"하여 "강하고 일관성 있는 이집트 사회 건설"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했다고 밝혔다.[99] 그는 군대가 정치에서 벗어나 있지만, 국민의 요청에 따라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100] 슈라위원회는 해산되었다.[101]
무르시는 자신의 축출을 "완전한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유지하고 유혈 사태를 피할 것을 촉구했다.[102] 이집트 대통령 외교관계 보좌관실도 무르시 축출을 "군사 쿠데타"라고 칭하며, "투표함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했다.[103][104][105]
무르시 축출 발표에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반 무르시 시위대는 불꽃놀이를 하며 "알라후 아크바르"와 "이집트 만세"를 외쳤다.[102][106]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쿠데타가 혁명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콥트 정교회 교황 타와드로스 2세, 알아즈하르 대이맘 아흐메드 엘타예브, 타마로드 청년 지도자들은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108] 알누르당은 대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아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언급했다.[109]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오른쪽 뒤)과 압델 파타 알시시 국방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2013년 4월 24일 촬영.
2013년 1월부터 압델 파타 알시시 이집트군 최고평의회 의장은 정세 악화 시 군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250] 4월 28일, 반정부 운동 “타마로드(Tamarod)(저항)”가 결성되어 6월 29일까지 22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반정부 세력은 군의 개입을 기대하며,[251] 무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인 2013년 6월 30일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계획했다.[285]
6월 30일, 이집트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하여 무르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이었지만, 밤이 되자 폭력적으로 변해 무슬림 형제단 본부가 공격받았다.[289] 7월 1일에는 4명의 각료가, 7월 2일에는 외무장관과 대통령부 대변인 2명이 사퇴했다.[291][292]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는 7월 1일 무르시에게 48시간 이내에 국민의 희망을 실현하는 포괄적인 로드맵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294] 그러나 무르시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군의 요구 철회를 요구했다.[300]
4. 1. 이슬람 세력의 반발과 시위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은 쿠데타를 "완전한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즉각적인 복권을 요구했다.[102] 무르시 대통령 외교관계 보좌관실은 무르시의 축출을 "군사 쿠데타"라고 칭했고,[103][104] "투표함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했다.[105] 그의 지지자들은 무르시 반대 시위에 맞서 라비아 알 아다위야 모스크에서 맞불 시위를 시작했다.[60] 무르시 지지자들은 카이로의 라바아 광장과 다른 도시들에 모였다.[68][69]다미에타에서는 250명의 어선 선원들이 나일 강을 따라 항해하며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70]
무르시 지지 시위대는 무르시의 성명을 들었고,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시되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쿠데타"라고 부르고 군의 성명을 거부했다. 자유정의당의 가말 헤쉬마트는 "폭력으로 향하는 방향은 전혀 없다. 형제단은 폭력으로 길러지지 않았다. 그들의 대의는 평화로운 것이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 쿠데타"보다 강력하다. 군대는 "수치스러운 쿠데타"를 자행했다. 우리는 여전히 거리에 있으며, 모든 군대가 시시가 한 일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아직 모른다."라고 말했다.[110]
7월 4일, 무슬림 형제단 대변인은 "군사 쿠데타"에 맞서 "엄격하게 평화적인" 시위를 촉구했다.[132] 무르시 지지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군경과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7월 5일, 군대는 공화당 경비대 본부에서 무르시가 구금된 것으로 알려진 곳에서 발포하여 무르시 지지 시위대 최소 51명을 사살했다.[133] 일부 목격자들에 따르면 군대는 아침 기도가 끝날 무렵 아무런 이유 없이 발포했고, 즉시 실탄을 사용하여 사살했다.[134][135] 이집트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BBC 뉴스(BBC News)'' 기자 제러미 보웬(Jeremy Bowen)은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136]
7월 8일 새벽 기도 후 무르시 지지 시위대와 군대 간에 공화당 경비대 부지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군대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들이 부지를 습격하려고 했고, 장교 1명을 포함해 42명이 부상당했다.[142] 반면 무슬림 형제단은 경찰이 무르시 복직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농성을 강제 진압한 후 총격으로 지지자 42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모하메드 벨타기(Mohamed Beltagy) 의원은 이 사건을 새벽 기도 중 발생한 "대학살"이라고 묘사했다.[143]
7월 26일 심야부터 27일 아침에 걸쳐 카이로 교외 나스르 시티에서 중앙 치안 부대가 무르시 지지 시위대를 공격하여 75명 이상이 사망했다.[317] 치안 부대 측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 무르시 지지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 측은 치안 부대가 실탄을 사용했다고 지적했고, 이브라힘 내무장관은 실탄 사용을 부인했다.[318]
2013년 7월 27일 카이로 대량 학살 이후 모르시 지지자
2013년 7월 5일, 다미에타(Damietta)에서 축출된 무르시 대통령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4. 2. 과도 정부의 대응과 국제 사회의 반응
과도 정부는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관련 언론 매체를 폐쇄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314] 2013년 8월 14일, 군경은 카이로의 무르시 지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58] 국제 사회는 이집트 군부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했지만, 일부 걸프 국가들은 이집트 과도 정부를 지지했다.
무르시 해임 이후에도 구금은 계속되었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유럽, 미국 등에서 석방 요구가 있었으나[310][311] 과도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7월 4일 무슬림 형제단 최고 지도자 무함마드 바디우가 체포되었고,[312] 7월 5일에는 무슬림 형제단 부단장이자 사실상 최고 실력자인 하이라트 샤티르도 구금되는 등[313] 많은 간부들이 구금되었다. 또한 은행 계좌가 동결되고, 무슬림 형제단 계열 언론 매체가 폐쇄되었다.[314] 7월 29일에는 무르시 지지파인 와사트당의 당수와 부당수가 구금되었다.[315] 8월 4일, 쿠데타를 비판하고 무르시 지지파 시위에 참여할 의향을 밝힌 예멘 출신 노벨 평화상 수상자 타와쿨 카르만이 카이로 공항에서 이집트 입국을 거부당했다.[316]
무르시 정권 지지자들은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정통성을 주장하며 무르시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했다. 7월 26일 심야부터 27일 아침에 걸쳐 카이로 교외 나스르 시티에서 중앙 치안 부대가 무르시 지지 시위대를 공격하여 75명 이상이 사망했다.[317] 치안 부대 측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무슬림 형제단 측은 치안 부대가 실탄을 사용했다고 지적했고, 이브라힘 내무장관은 실탄 사용을 부인했다.[318]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민정 이양이 지연됨에 따라 군대에 대한 시위가 발생한 것을 반성하여 7월 8일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 의회 선거를 실시한다는 대통령령이 발표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학교수, 판사, 각 세력 대표 등으로 구성된 헌법 기초 위원회가 설치되는 등 민정 이양이 서둘러졌다.[251]
국제 사회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 아프리카 연합 의장 응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는 무르시의 축출은 이집트 헌법 조항을 위반한 것이며, 정부의 비헌법적 변화에 관한 아프리카 연합의 원칙에 해당한다고 밝혔다.[179] 7월 5일 논의 후, 평화안보이사회(PSC)는 쿠데타를 이유로 이집트를 정지시키기로 결정하고 헌법 질서 회복을 위해 "고위급 인사"로 구성된 팀을 파견한다고 밝혔다.[180]
–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 캐서린 애슈턴은 모든 당사자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및 의회 선거와 헌법 승인을 포함한 민주적 과정으로 신속히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182] 카이로 방문 중 애슈턴은 임시 대통령 아들리 만수르를 만났지만, 무르시를 만나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고 말했다.[181]
– 반기문 사무총장은 평정, 비폭력, 대화 및 자제를 촉구하며,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권리의 보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82] 그는 또한 "민정 복귀를 신속히 재개할 것"을 촉구했다.[188] 인권 고등판무관 나비 필레이는 모든 당사자에게 모든 시민의 인권이 존중되고 보호될 수 있도록 평정을 회복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184]
아르헨티나 –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이집트에서 최근 발생한 사건들, 즉 민주적 과정의 중단, 합법적인 당국의 축출, 복잡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우려하며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185]
오스트레일리아 – 케빈 러드 총리는 이집트의 신속한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고 이집트에 대한 국가 여행 경보를 두 번째로 높은 수준으로 상향 조정했다.[186]
쿠웨이트 – 쿠웨이트 통신은 "사바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폐하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국가의 이름으로 이 과도기적이고 역사적인 시기에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에게 지도력을 맡으신 것을 축하드린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178] 이후 쿠웨이트는 무르시 축출 이후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195]
레바논 – 타맘 살람 총리 지명자는 아들리 만수르에게 잠정 지도자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다.[178]
리비아 – 알리 지단 총리는 "우리는 이집트 국민의 어떤 정치적 선택이든 지지하며, 평화와 안정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196]
말레이시아 – 나집 라작 총리는 "말레이시아인들은 이집트의 갈등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197]
노르웨이 – 에스펜 바르트 아이데 외무장관은 노르웨이는 이집트의 정치 과정이 통합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않고 군대가 개입하여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228]
네덜란드 – 영사 업무 대변인 툰 반 와이크는 "우리는 이집트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211]
터키 – 터키는 쿠데타에 부정적인 신호를 보냈고 성명, 외교 채널 및 재정 조치를 사용했다.[21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어디에 있든...쿠데타는 나쁩니다. 쿠데타는 명백히 민주주의의 적입니다."라고 말했다.[215]
아랍에미리트 – 압둘라 빈 자이드 알나흐얀 외무장관은 이집트의 상황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알 나흐얀은 또한 이집트 군대를 "강력한 방패"이자 "보호자"로 칭찬했다.[205]
2013년 9월 21일 영국 카디프에서 이집트 시위대가 반쿠데타 표지판을 들고 있다. –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영국은 "군사 개입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헤이그 외무장관은 영국은 "민주 체제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군사 개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219]
이슬람 협력 기구 - 에크멜레딘 이흐산올루 사무총장은 "이집트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496]
아프리카 연합 - 일련의 정변은 이집트 헌법에 위배되는 정권 교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7월 5일 이집트의 가맹 자격을 일시 정지했다.[497]
일본 -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은 "모든 관계자들이 폭력을 피하고 최대한의 자제와 책임있는 행동을 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498] 도요타 자동차, 스즈키, 오츠카 제약이 현지 생산을 중단했고, 스미토모 전기 공업은 일본인 주재원의 귀국을, 소니는 사무소 이전을 실시했다.[499] 8월 17일에는 외무성이 일본인들에게 귀국 검토를 촉구했고, 주 이집트 일본대사관 직원, 청년 해외 협력대원, 카이로 일본인 학교 교직원, 국제협력기구 이집트 사무소 직원 및 그 가족들이 귀국했다.[501]
4. 3. 시나이 반도에서의 무장 세력 활동 증가
쿠데타 직후,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지역에서 무장 세력의 공격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라파에서는 군사 정보 본부 인근 경찰서가 로켓 공격을 받아 군인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으며, 알 아리시 공항을 경비하는 군 검문소에도 로켓 추진 수류탄 공격이 있었다.[170] 알 아리시에서는 군부 축출 다음 날, 군대와 싸울 전쟁 위원회를 구성하라는 요구와 함께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고, 시나이 북부 10개 지역에서 충돌이 발생해 공항이 폐쇄되기도 했다.[171]
2013년 7월 말, 이집트군은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시나이 작전"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172]
5. 언론 통제와 인권 탄압
쿠데타 이후 이집트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고,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무슬림 형제단 계열 언론 매체는 폐쇄되었고, 외신 기자들도 체포되거나 추방당하는 사례가 발생했다.[126]
무슬림 형제단이 소유한 미르 25(Misr 25) 채널은 폐쇄되었고, 당국은 해당 채널 기자들을 체포했다.[126] 알 하페즈(Al Hafez)와 알 나스(Al Nas) 채널도 폐쇄되었다. 몇 시간 후, 모르시 지지 성향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알자지라의 무바셔르 미스르(Mubasher Misr)도 방송이 중단되었고, 사무실이 급습당했으며 직원들이 구금되었다.[127]
언론자유보호위원회(CPJ)는 2013년 7월 8일 이전 2주 동안 이집트의 불안 상황을 보도하던 중 두 명의 기자와 한 명의 학생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129] 2013년 충돌 당시 사망한 기자 중 한 명은 아흐메드 사미르 아셈(Ahmed Samir Assem)으로도 알려진 26세의 사진기자 아흐메드 아셈 엘-세누시(Ahmed Assem el-Senousy)였다.[129][130][131] 그는 시위대에 발포하는 보안군을 촬영한 후 저격수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130][131] BBC에서 취재 중이던 기자 제러미 보웬(Jeremy Bowen)은 7월 5일 이집트 보안군이 발사한 산탄에 머리를 맞았다.[129]
2013년 8월 시위대 강제 해산 이후에는 언론인들이 군 저격수의 표적이 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456] 17일까지 3명의 언론인이 시위대 강제 진압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457]러시아의 Russia24(Russia 24) 텔레비전 방송국 촬영팀은 무장 집단의 공격을 받아 컴퓨터, 여권, 현금 등을 강탈당했다.[458] 18일에는 현지 신문 기자가 검문소에서 군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459] 언론인들이 치안 당국에 체포되는 사례도 발생했으며, 보도 규제는 무르시 정권 시절보다 악화되었다고 지적되고 있다.[374]
6. 영향
2013년 9월, 이집트에서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와 테러, 그리고 정부의 비상사태 연장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9월 5일, 카이로 나스르 시티에서 무함마드 이브라힘 내무장관을 노린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나, 내무장관은 무사했다.[389] 6일에는 디미야트(다미에타)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무함마드 무르시 지지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로 2명이 사망했다.[390] 11일에는 시나이반도 라파 지역에서 군 정보기관 건물과 검문소를 겨냥한 차량 자폭 테러로 군인 6명이 사망했으며,[391] “안사르 바이트 알-마크디스”라는 무장 세력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392]
이러한 상황에서 9월 12일, 이집트 대통령궁은 8월에 선포된 비상사태를 2개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393] 그러나 이는 치안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394]
9월 13일, 무르시 지지 세력은 “순교자의 피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시위를 벌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 1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베니수에프주에서는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 충돌로 1명이 사망했다.[395]
9월 23일, 법원은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임시 정부에 형제단의 자산을 몰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397]
9월 22일과 29일에는 일부 대학에서 쿠데타 반대 시위와 무르시 지지 세력 및 반대 세력 간 충돌이 발생하여 부상자가 발생했다.[396][398] 9월 30일에는 시나이반도아리시 등지에서 경찰관 5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399]
6. 1. 이집트 민주주의의 후퇴
2013년 쿠데타는 이집트 민주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압델 파타 알시시 장군은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하고 가택 연금했으며,[94][95] 공화당 경비대 막사에 구금했다.[96]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무르시는 군 기지로 옮겨져 이동이 제한되었다.[97] 알시시는 새로운 대통령 및 슈라위원회 선거를 발표하고, 아들리 만수르 대법원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으며,[94] 슈라위원회는 해산되었다.[101]
무르시는 자신의 축출을 "완전한 쿠데타"라고 비난하며,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지키고 유혈 사태를 피할 것을 촉구했다.[102] 이집트 대통령 외교관계 보좌관실 또한 무르시의 축출을 "군사 쿠데타"라고 칭하며, "투표함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했다.[103][104][105]
자유정의당의 가말 헤쉬마트는 "형제단은 폭력으로 길러지지 않았다. 그들의 대의는 평화로운 것이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 쿠데타'보다 강력하다"라고 말했다.[110]
군부의 정치 개입은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고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2. 사회 분열과 갈등 심화
2013년 이집트 쿠데타는 이집트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대립은 폭력 사태로 이어졌고, 사회 통합을 어렵게 만들었다.[99]
6월 28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이집트 전역에서 무르시 반대 시위가 시작되었고, 무르시 지지자들은 나스르 시티의 라비아 알 아다위야 모스크에서 맞불 시위를 벌였다.[60] 상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무르시 지지 시위대의 협박을 받아 시위에 참여하지 않도록 압력을 받았다.[41] 6월 29일, 타마로드는 무르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청원에 2,2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62][63]
6월 30일, 이집트 전역에서 1400만 명의 시위대가 무르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65] 그러나 독립적인 관찰자들은 실제 무르시 반대 시위대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우려를 제기했으며, 한 인파 통계 전문가 연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66][67] 수십만 명의 무르시 지지자들은 카이로의 라바아 광장과 다른 도시들에 모였다.[68][69]
7월 3일, 군부의 최후통첩 시한이 다가오자 폭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고조되었다.[90] 무르시 반대 시위와 찬성 시위가 모두 있었는데, 특히 무르시 지지 시위는 나스르 시티와 카이로 대학교 근처에서 벌어졌다. 시위대가 목숨을 걸고 정부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자 군 탱크들이 소규모 무르시 지지 집회 두 곳을 포위한 것으로 보고되었다.[91]
압델 파타 알시시 장군은 "어젯밤 대통령의 연설은 국민의 요구를 충족하고 부합하지 못했으며, 이에 무장 세력은 어느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국가 세력과 청년들의 상징들과 협의했습니다. 강하고 일관성 있는 이집트 사회 건설을 실현하는 초기 단계를 포함하는 로드맵에 합의했습니다. 이 사회는 그 어떤 아들과 흐름도 배제하지 않으며 갈등과 분열의 상태를 종식시킵니다."라고 말했다.[99]
무르시 축출 발표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환호를 불렀다.[106] 반 무르시 시위대는 "알라후 악바르"와 "이집트 만세"를 외치며 불꽃놀이를 터뜨렸고,[102] 군중 속 사람들이 든 녹색 레이저 불빛이 하늘을 밝혔다.[107] 콥트 교황 타와드로스 2세, 알아즈하르 대이맘 아메드 엘타예브, 모하메드 엘바라데이[108] 및 타마로드의 일부 청년 지도자들은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 알누르당은 대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언급했다.[109] 친 무르시 시위대는 무르시의 성명을 들었고,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시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쿠데타"라고 부르고 군의 성명을 거부했다.
자유정의당의 가말 헤쉬마트는 "폭력으로 향하는 방향은 전혀 없습니다. 형제단은 폭력으로 길러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110]
이집트 여론조사센터(Baseera)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17%는 농성이 평화적이었다고 믿는 반면, 67%는 평화적이지 않았다고 믿었다.[162] Baseera의 또 다른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69%는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적) 존속을 승인하지 않으며, 57%는 무슬림 형제단이 농성 해산 이후 모든 폭력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11월 이후에도 무르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11월 1일, 무르시 지지 세력의 쿠데타 반대 시위가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다.[422] 11월 12일, 만수르 대학교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425] 11월 15일,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1명이 사망했다.[429] 11월 20일에는 시나이반도 북부에서 군인 수송 버스에 대한 자동차 폭탄 공격으로 군인 12명이 사망했다.[431]
6. 3. 경제적 어려움 가중
2013년 압델 파타 알시시의 쿠데타 이후 이집트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주요 산업인 관광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기자의 피라미드 폐쇄[468] 등으로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관광 수입이 크게 줄었다.[475]아부 심벨 신전을 방문한 관광객이 단 한 명뿐이었던 적도 있었으며,[469] 호텔 가동률 저하[470]와 샤름 엘셰이크 등지의 호텔 영업 중단[471] 사태까지 발생했다. 2013년 7월 관광객 수는 전년 동월 대비 24.5% 감소했고,[472] 8월에는 46% 감소,[473] 9월에는 5만 명으로 급감했다.[474]
실업률도 증가했는데, 특히 도시 지역의 실업률이 크게 상승했다.[477]인플레이션 또한 심화되어, 쿠데타 이후 여러 차례 10%를 넘는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했고,[478] 식료품 가격도 계속 상승했다.[479][480][481][482][483]
쿠데타 발생 이후 2013년 7~9월 GDP 성장률은 1.04%로, 쿠데타 이전인 2013년 4~6월 성장률 1.5%에 비해 감소했다.[466][467] 재정 적자 역시 599억 이집트 파운드로, 무르시 정권 시절보다 증가했다.[484]
임시 정부의 야간 외출 금지령으로 운송업 등이 악영향을 받았고,[485] 회복세를 보이던 자동차 판매량도 쿠데타 발생 직후 급감했다.[486][487]
2013년 이집트 쿠데타는 중동 지역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의 무장 세력 활동 증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194] 터키는 쿠데타를 강하게 비난한 반면,[215][216]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은 이집트 과도 정부를 지지하여,[205] 중동 국가들 간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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